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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군산의 군산(郡産) - 군산에 모여 군산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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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1899년, 군산은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이 이루어지며 근대도시로서의 모습을 서서히 갖춰 나간다. 섬나라인 일본에게 있어 쌀은 귀중한 식량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수도에 쌀을 보급하는 주된 지역이었던 호남지역은 쌀이 귀했던 일본에게 구미가 당기는 비옥한 땅이었다. 군산내항은 호남지역의 쌀을 실어와 일본으로 가져가는 최종관문으로서 집중 개발되었던 것이다. 격자형 가로망과 같은 근대식 풍경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1912년, 군산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섰다. 이 철도는 후에(1920년) 군산역에서 내항까지 연장되었다. 현재 군산내항의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상징적 다리인 부잔교는 8년에 걸친 축항공사(1926-1933년) 끝에 완성된, 조석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건조물이다. 이후 부잔교와 연결되는 위치에 상옥창고 3동을 건립하였고, 이로써 만들어진 전체적 도시경관은 군산의 정체성과도 같은 이미지를 형성한다.
평야-철도-창고-항구-배라는 수탈의 공간전이 속에서, 상옥창고는 ‘쌀의 도시 군산’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강과 바다를 활용하며 발달한 조운 산업과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산업유산으로의 가치 또한 내재하고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창고라는 공간은 예부터 군산 시민들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PRESENT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쌀의 군산으로 불렸던, 군산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옥창고’는 수탈이라는 수치스러운 역사적 표상으로만 인식되며 역사 의식의 부재 속에 철거 되었다. 오늘날 군산항의 그 자리엔 정체성 없는 공지와 사용률이 낮은 주차장만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나마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들을 관광사업을 위한 소유물로만 여기고 개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을 함께 묶어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은 전무한 채 사업 유치에만 혈안인 것이다.
PROPOSAL
이에 우리는 군산의 정체성과 도심 재생을 위한, 문화의 창작과 향유가 교차하는 공간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초석으로서 상옥창고를 재생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공간 제안은 기존의 군산시에서 계획하고 있는 관광사업적 부분에도 유익할 것이라 판단되며, 단순한 랜드마크적 건축물이 아닌 문화를 창출하며, 동시에 정체성을 사유하고 향유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방향적 수탈동선과는 다른 다양한 분야의 문화와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양방향적 계획이 될 것이다.
상옥창고를 재생시킴에 있어 상옥창고가 이전엔 단순히 물자를 보관하는 저장 공간이었다면, 우리가 새로이 제안하는 상옥창고는 문화를 담고 향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와 더불어 재생되는 상옥창고의 문화를 담는 것을 지원 할 문화적 플랫폼을 제안한다. 이 플랫폼에는 현대적 창고 공간인 컨테이너가 삽입된다. 컨테이너는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컨텐츠를 담을 수 있는 가변적 공간이며, 이동이 가능한 동시에 재사용이 가능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을 운영하는 실질적 이용자는 군산을 구성하고 있는 지역민들이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서 레지던시를 삽입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교류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했다. 문화의 창작과 향유라는 움직임 속에 군산을 구성하는 지역민들은 다른 도시에서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할 것이다.
위의 창작활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작품들은 상옥창고에서 전시되고, 대상지 주변의 철도나 부잔교를 이용해 타 지역의 전시활동에도 참여하며 앞으로 군산에서 일어날 활동과 타 지역의 활동이 교류할 수 있는 기점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계획이 아픈 역사를 들추는 것이 될지라도 상옥창고는 그만큼 군산과 밀접한 공간이며 오늘날 군산의 문제점들을 담고 해결해 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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